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 여행

[대구] 향토역사관

by 국강상 2020. 4. 27.

 

​14.12.23

 

지나던 중 들린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 달성공원

 전화번호 053-606-6420

 이용시간​ 09:00~18:00

 

 시내버스 300 , 414-1 , 427 , 808 , 836 , 939, 동구2 , 북구3 달성공원 앞(건너편) 에서 하차.

 

 휴대폰 카메라를 사용해서 그런지 화질이 그다지 좋지 않다.

 달성공원 내 위치한 향토박물관. 어찌보면 대구를 상징하는 곳이지만 많은것들이 낡았다. 오래된 달성토성처럼 곱게 낡았으면 모르겠는데, 내 눈에 보이는 그 낡음들은 추하고 지저분하게 낡아가고 있는것들이 더 많았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배치도


이하 Galaxy Nexus 폰으로 촬영

 

일제강점기 시절 달성토성의 모습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는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B.C. 3,5000 ~ B.C. 2,000) 무렵 신석기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 후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쳐 기원 원년 전후 진한 및 변한 24국 중 한 연맹체로서 읍락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5세기말에서 6세기초가 되었을 무렵 신라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문왕 9년(689)에는 신라 도읍을 달구벌(達句伐)로 옮기려고까지 하였다.

 

 고려시대 대구는 신라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으나, 12세기부터 점차 위상이 상승하기 시작하였고, 무신정권기에는 대구 부근에서 발생한 민란을 지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고 침입 때에는 부인사에 수장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으며. 제5차 몽고 침입때에는 공산성에서 대구지역 주민들이 대몽항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 대구는 농업의 주요생산지로, 또 영남 내륙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 후 세조 12년(1466)에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이후 영남지역의 행정, 교통, 군사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이 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던 시기 일제의 침략이 점차 노골화되자 1907년 국내 최초로 대구에서는 절미, 금연, 금주를 통하여 기울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국체보상운동을 일으켰다.

 

 1910년 일제의 의해 국권이 침탈 당하자, 1915년 영남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학새들이 중심이 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처럼 대구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 중 하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해외 귀환동포와 월남한 피난민의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를 보게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기에는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1960년 대구에서 일어난 2.28학생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대구는 성장을 계속하여 영남지역의 중심도시로 발전, 1995년 광역시가 되면서 7개 구와 1개 군을 거느린 거대도시로 성장하였으며, 2002월드컵을 치르고,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는 등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달성십경

 신증동국여지승람본(1530) / 사가 서거정(1420-1488)지음

 

 달성십경을 노래한 서거정(徐居正)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십수(十首)가 전해오고 있다. 원래 십영(十詠)인 것을 대구십영(大邱十詠), 대구십경(大邱十景), 달성십영(達城十詠), 달성십경(達城十景)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달성십경이 있어 근 500년 전의 대구 풍광을 그려볼 수 있다.

 금호범주(琴湖泛舟, 금호강의 뱃놀이)

 입암조어(笠巖釣魚, 입암에서의 낚시)

 귀수춘운(龜峀春雲, 거북산의 봄구름)

 학루명월(鶴樓明月, 금학루의 밝은 달)

 남소하화(南沼荷花, 남소의 연꽃)

 북벽향림(北壁香林, 북벽의 향림)

 동화심승(桐華尋僧, 동화사의 중을 찾음)

 노원송객(櫓院送客, 노원에서의 송별)

 공영적설(公嶺積雪, 팔공산에 쌓인 눈)

 침산낙조(砧山落照, 침산의 저녁 노을)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역사 이만년의 연표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부의 모습. 대구읍성 서편으로 달성이 보인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구석기시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해서 처음으로 돌을 깨어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던 석시문화()시대를 구석기시대라 부른다. 현 인류의 모든 문화는 이 석기문화에서 출발하여 발전하였다. 한반도에서는 보통 3만년 이전을 전기구석기시대, 그로부터 1만년 전까지를 후구석기시대라 부르고 있다.

 

 후 구석기시대는 일반적으로 뗀석기와 골각기 등을 사용해서 식물채취와 짐승사냥을 생업으로 하면서, 가족 단위로 무리를 지어 자연의 은신처를 찾아 떠도는 생활을 하였다. 대구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달서구 월성동에서는 좀돌날석기가 포함된 문화틍이 확인되었다. 이는 이미 1만년 이전에 대구에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 준다.


 신석기시대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되는 신석기시대는 약 1만년 전부터 빙하기(氷河期)가 끝나고 서서히 온난한 기후로 변하던 때이다. 인류는 이전과 달리 간석기를 제작하고 토기와 직물을 발명하여 사용하였다. 사냥과 채집 외에 식물재배, 가축사육을 주 생업으로 하게 되고 움집(竪穴住居)을 만들어 정착생활을 하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이 때가 되면 덧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었는데 특히 빗살무늬 토기는 전국에 보급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수성구 상동의 지석묘로, 발굴 과정에서 빗살무늬 토기 편이 출토되었다. 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구 대봉동에서 빗살무늬 토기와 움집터가 발굴되었고, 북구 서변동에서도 빗살무늬 토기와 집석유구(集石遺構) 및 움집터가 발굴되었다. 현재까지의 발굴유적을 보면서 이 시기의 사람들은 대개 하천변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았다.

 대표적인 유적지로 월성동(구석기), 서변동(신석기)이 있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청동기시대

 중국의 상(商), 주(周)나라에서 먼저 발달하였던 청동기 문화는 주변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중국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청동기시대로 진입한다. 주거생활에서는 마을을 형성하고, 신분과 재산의 차이를 갖는 사회로 변하며, 이전에 사용하던 빗살무늬 토기는 제작이 쉽고 많이 만들 수 있는 민무늬 토기로 바뀐다. 청동기는 자체적으로 생산하지는 못하였으나, 간화살촉, 간돌칼 등 청동제 무기를 모방해 기능을 높인 석기를 사용하였다. 특히 매장형식에서는 고인돌(支石墓)을 조성하게 된다.

 

 대구에서도 청동기를 모방한 화살촉, 칼과 민무늬 토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대구지역을 흐르는 금호강, 신천, 매호천, 남천, 팔거천, 진천 등의 유역에 고인돌이 수십에서 수백기 까지 조성되어 전근대까지도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이러한 고인돌 유적의 분포는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대구가 한반도 남쪽의 큰 중심지 중 하나를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서변동, 월성동, 상동, 침산, 연암산​에서 출토된 유물과 일러스트 아래 전경은 1917년 진천동 지석묘군(고인돌)의 모습이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원삼국(초기철기) 시대

 동아시아에서 철기문화가 출현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4세기경 중국에서는 철제무기가 보급되고 기원전 3세기경이 되면 농기구를 비롯한 일반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하게 된다. 한반도에도 이 무렵 철기가 전해져 빠르게 보급되어 이전의 청동기는 의기화(儀器化)되거나 장식용으로 쓰이게 되고, 철기는 실용의 유력한 지배자가 출현하여 국가 발생의 전단계로 발전한다. 매장(埋葬)유적도 고인돌이 사라지고 널무덤(木槨墓)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변화로 기원전 1세기 무렵, 대구에는 지금의 달성(達城 : 현 달성공원) 주변에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리웠던 읍락국(邑落國)이 형성된다.

 

 청동기가 의기화 되는 기원전 1세기 유적은 비산동, 평리동, 신천동, 만촌동, 지산동 일대에 분포하는데,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된 칼과 꺽창, 거울을 일괄유물로 한 매장유구(埋葬遺構)가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경의 유적은 복현동, 팔달동, 대명동, 불로동, 봉무동, 두산동 등지에 분포하는데, 무덤 양식에 있어 기존의 널무덤과 더불어 덧널무덤(木槨墓)과 돌덧널무덤(石槨墓)이 나타난다. 또 달성토성, 검단토성, 봉무토성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미늘쇠 / 발걸이 / 여러가지쇠무기 / 말띠꾸미개 / 말띠드리개 / 고리자루손칼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장대투겁 / 빗살무늬토기

 꺽창 / 청동꺽창 / 청동거울 / 얼굴모양토우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표사진 삭제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삼국시대

4세기경이 되면 삼국(三國)이 정립하게 된다. 이 시기 대구지역 내에서는 지역 집단간에 불균등한 발전이 격화되어, 강한 지도력과 권위를 갖는 우두머리 집단(首長層)이 등장하여 권위의 상징으로 거대한 묘(古墳)를 축조한다. 이 고분 조성시기가 삼국시대에 해당하며, 대구가 서라벌 세력에 의해 신라로 통합되던 시기이기도 한다. 비산동, 내당동, 대명동, 불로동 등지에 축조된 고분들은 이 시기 지역 우두머리 집단의 묘이다. 고분속에 넣었던 부장품들은 고분의 규모와 더불어 집단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 중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달성고분 37호에는 다수의 토기를 비롯하여 경주의 금관과 같은 출자형 금동관(出字形 金銅冠), 금제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와 더불어 둥근 고리모양 손잡이장식이 달린 큰칼(環頭大刀) 등 많은 철제무기가 부장되어 있었다. 이 고분은 6세기 이후 대구가 신라의 한 지방으로 되기 이전에 축조된 우두머리 집단의 무덤으로서 당시의 권위와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금동관 / 굵은고리귀걸이 / 관장식 / 고리칼자루 / 고리자루큰칼 / 곱은옥장식목걸이/ 가는귀걸이 / 고리큰칼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달성

 달성(達城)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그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만든 토성(土城)이다. 규모는 동서 약 380m, 남북 약 470m로 전체 길이는 1,300m이다. 성벽 규모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하부 폭은 최대 20m에 이르며, 높이는 4~7m로 전체 모습은 오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경주 월성과 형태가 유사한 평산성(平山城)으로, 생김새와 보존상채가 양호해서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록으로는 신라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奈麻)벼슬의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하지만, 달성은 청동기시대부터 지역의 중심을 이루던 집단이 그들의 생활근거지를 이용하여 쌓은 토축성(土築城)으로, 여러 차례의 중, 수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 성은 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관아지(官衙地)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감영(監營)으로 이용된 적이 있었다.

 

 달성이란 지금과 같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05년이고, 그 후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과 식민지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1914년 대구신사(大邱神社)가 이 곳에 세워 졌으나, 1966년 8월에 신사건물을 해체하고 공원 내부를 정비한 후 오늘날과 같은 동물원 겸 공원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거북모양토우 / 잔 / 사족토기 / 빗

 쇠도끼 / 쇠날 / 토기조각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대구는 지방의 한 현(縣)으로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신문왕 9년(689)에는 신라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 신사의 지방 군사조직인 10정(停) 중 하나가 대구의 진산인 비슬살 아래(현 현풍)에 주둔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는 달구화(達句火)에서 대구(大邱)라 개칭하였다. 신라말에는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대가 왕위쟁탈전 과정에서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고, 후삼국기 왕건과 견훤도 경주를 차지하기 위해 대구 공산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는 대구가 신라 말까지도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준다.

 

 신라에는 다섯 명산(五岳)이 있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이들 오악은 국가의 동, 서, 남, 북과 중앙을 대표하는 산으로 지금의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그리고 중앙인 중악(中岳) 팔공산을 말한다. 팔공산은 신라의 큰 신앙 대상지답게 동화사, 송림사, 부인사, 은혜사 등 불교유적이 많다. 지금도 동화사 입구의 마애불좌상(보물 제 243호)을 비롯해 산 전역에 보물급 문화유산이 다수 전한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굽다리긴목항아리 / 이형토기 / 짧은목항아리/ 굽다리접시/ 굽다리긴목항아리 / 손잡이달린바리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동화사 입구의 마애여래좌상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굽다리접시

 소탑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고려시대

 신라 이래의 전략적 요충지답게 대구는 후삼국기에 들면서 왕건과 견훤이 팔공산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이는 등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송도(松都:개성)로 정해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이전의 지향적 요충지로서의 대구는 비중이 크게 감소되었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壽城郡), 대구현(大邱縣), 해안현(解顔縣)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대구현은 수성군에 속해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현 경산)에 속하였다. 이후 현종 9년(1018)에는 수성군과 해안현은 경주인 동경(東京)에 속하게 되고,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현 성주)의 속현(屬縣)이 된다. 이처럼 고려전기에 있어서는 속현으로 위상이 축소되었다가, 인종 21년(1143) 현령관(縣令官)이 파견되어 주현(主縣)으로 승격한다. 이는 중앙에서 대구지역을 중요한 농업생간지로 인식한 데 따른 것이다.

 

 이러한 위상의 결과로 12세기의 무신정권기에는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가 그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고, 몽고침입 때 공산성(公山城)에서 벌어진 항쟁 등이 보여 주듯이 정치, 군사적 요충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고려사절요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청동거울

 청동물품(병, 그릇, 접시, 수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동구 지묘동의 왕산과 신숭겸 유적(표충사), 대몽항쟁도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초조대장경 인본

 초조대장경은 고여 인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대장경으로서 그 후 대구부인사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조선시대

 고려 말 정치, 군사 및 교통상의 요충지로 부각된 대구(大邱)는 농업의 중심지로도 발전하였고,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 조선이 건국된 후 점차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조선 건국직후인 태조 3년(1394) 인근의 수성현(壽城縣)과 해안현(解顔縣)이 대구현에 속하게 되어 대구의 인구는 약 1,300여 호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구의 발전은 농업을 비롯한 산업의 발달로 교통의 편리, 그에 따른 시장의 발달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대구는 발전을 거듭하여 세종 1년(1419)에는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고, 세종 30년(1448)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민간 구휼기관인 사창()이 설치되어 시범 운영되기도 하였다. 세조 12년(1466)에 대구는 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정치, 군사적 요충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선조25년 (1592) 임진왜란 때에는 대구가 의병활동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고,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영남지역의 교통, 군사 중심지이다 행정 중심지로도 발전하게 됨에 따라 명실상부한 영남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해안현, 하양현(河陽縣), 경산현(慶山縣), 수성현, 화원현(花園縣), 하빈현(河濱縣)을 거느린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구가 이처럼 발전하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교통상의 요충지가 되었던 것과 감영이 설치되면서 교통상의 요충지가 되었던 것, 그리고 농산물의 주요 집산지였던 것 등에 말미암은 것이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우리는 그처럼 화려한 행렬을 이루며 도시의 내부를 오랫동안 둘러보았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평행사변형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각 벽면의 중앙에는 똑같은 규모의 요새화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서 나는 가을의 황금빛 들판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었다. 더 멀리 눈길을 돌리자, 주위를 마치 띠처럼 에워싸고 있는 구릉들이 푸르스름한 하늘 속으로 반쯤 사라져 가기라도 하듯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발치 가까이 시선을 떨구자, 대도시의 온갖 거리들과 광장, 기념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민중이 사는 구역에는 짚으로 엮은 지붕들이 빽빽했으나 도시의 중심구역, 그러니까 귀족들의 거주지역에는 용마루에서 처마 끝까지 직선과 곡선의 기막힌 조화를 펼치는 기와지붕들이 우아한 자태를 한꺽 뽐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멋진 지붕 양식이 둘 었었는데, 하나는 중국어(漢字)를 가르치는 학교 건물(향교)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관아 건물이었다. 관아에 딸린 여러 건물들 중에서도 또한 그 규모에서 압도적인 것이 방금 내가 나온 접견실 건물인데, 다채로운 색깔이 돋보이는 그 지붕 꼭대기에서는 관찰사의 거대한 붉은 깃발이 도시 전체를 굽어보며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구였다.”

 

-샤를 바라의 조선기행 중 대구편에서 발췌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태조실록 / 시기별 대구영역도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읍지

 조선시재 지방 각 읍의 지지(地誌) 또는 지방사(地方史)이자 행정사례집(行政事例集)

 

 대구읍사례

 지방관아의 조직과 재정운영 등을 기록한 실무 시행지침서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백자류

 

대표사진 삭제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준호구

 호주(戶主)의 요청에 의하여 해당관청에서 호적대장을 기초로 제작성해준 등본

 

 대구지도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임진왜란과 경상도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낙제선생문집 / 우락제 실기

 월곡우록 창의유록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존재실기책판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곽재우 의병장의 유품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조선시대 대구의 교통, 통신

 대구는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국도(中路)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각 지역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이어져 있는데다가, 낙동강 수로까지 있어서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한양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칠곡을 경유하여 금호강을 건너 대구에 도달, 청도, 밀양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대구에서 연결되는 각 도로망을 살펴보면, 대구 서문에서는 성주, 고령, 현풍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어서 경상북도의 전 지역과 연계되어 있었다.

 

 대구에는 낙동강 조운이 발달하여, 낙동강 하구인 경남 구포에서 뱃길을 통해 고령의 개포(開浦), 달성군의 사문진(沙門津), 칠곡의 왜관(倭館), 상주의 낙동(落東), 예천의 달지진(達池津) 및 마전(麻田), 안동의 영호진(映湖津)까지 이어져, 각종 물자교역과 조정에 보내던 세미(稅米)의 운송에 이용되었다.

 

 또한 대구에는 조선시대 중요 국방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마천산(馬川山:하빈면사무소 뒷산), 법이산(法伊山:수성관광호텔 뒷산), 성산(城山:화원유원지 내) 등 3곳에 설치되어, 동래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봉수로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조선시대 봉수도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마패

​ 관리가 공적인 일로 지방에 나갈때 역마를 징발하는 표 또는 암행어사가 인장대신 사용한 징표. 조선시대

 

 호패 / 행낭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읍성

 대구의 읍성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선조23년(1590) 달성(達城)에서 동으로 2리(약 800m) 떨어진 곳에서 토성으로 축조되었다. 그러나 이 토성은 임진왜란 일본군이 통과하면서 파괴되었다. 이후 약 140여 년 동안 대구는 성곽이 없는 관아도시로 있게 되었다.

 

 영조 12년(1736) 관찰사 민응수(閔鷹洙)가 영조의 윤허를 얻어, 그해 1월부터 6월까지 대구 주변 군현민들을 동원해서 달성으로 4리(약 1,600m) 떨어진 곳에 이전보다 넓게 석축으로 재건하였다. 축조 당시 읍성의 규모는 둘레는 2,124步(약 2.68km)이고 높이는 서남쪽이 18尺(3.78m), 동북쪽이 17尺(3.57m)이었으며, 성의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과 동서에 2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고종 7년(1870)년 김세호(金世鎬) 관찰사 때 대원군의 명에 의해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져 성벽이 개축, 확장되었고, 4개의 누각과 8개의 포루(砲樓)를 증설하였다.

 

 그러나 1906년 당시 관찰사 서리로 있었던 박중양(朴重陽)이 일본인의 요구에 따라 읍성을 철거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7년 4월 대구 읍성을 흔적 없이 해 버렸다. 달시 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觀風樓)와 읍성의 북서쪽 모서리에 있던 누각인 망경루(望京樓)는 달성공원으로 옮겨졌으나, 망경루는 철거되었고 관풍루는 전체적인 수리를 거쳐 현재까지 남아있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낙동강 조운

 조선시대에 낙동강유역에는 경상도 71개 주군(州郡) 다운데 58개 주군이 있었다. 또 이 지역은 농업생산성이 가장 높은 고싱었고, 그 농산물 또한 다양하였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여 낙동강유역 산물의 적지를 살펴보면, 오곡(五穀)인 벼, 보리, 수수, 콩, 조 가운데 조를 제외란 4종의 곡물은 경상도 각 읍이 모두 그에 해당하였다. 나라에 보내는 공물(貢物)도 안동 13동, 상주 11종, 진주 27종, 김해20종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러한 공물을 조세로 거두어 해상으로 운송하는 제도를 조운(漕運)이라 한다. 나라에서는 각 군현의 창고로 거두어들인 조세미포(租稅米包)를 모아서 농한기를 이용하여 매년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수송하였다.

 

 경상도의 공부(貢賦)수송로는 낙동강 하구의 하단에서 시작하여 구포, 삼랑진, 개포, 사문진 등을 거쳐 상주에 이르고, 이곳에서 육로로 조령을 넘고 충주를 거쳐 한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수로 연변에 설치한 창고 중 해상수송을 맡은 곳을 해운창, 강을 통한 수송을 맡은 곳을 수운창(水運倉)이라 하였는데, 낙동강수로의 요지인 달성군 화원면 천내리에는 일본상품을 수입해 보관, 수송하기 위한 화원창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일관계와 화원 왜물고

 낙동강유역은 대일교섭의 창구로서, 왜구(倭寇)에 대한 방어거점으로 또 대일교역의 중심지로서 항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세종8년(1426) 대일교섭의 결과로 삼포가 개설되자, 일본의 사신, 상인과 상품은 낙동강을 통해 왕래하게 되었다. 이들의 서울 왕래는 주로 경상도의 공부(貢賦)수송로와 같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상주에 이르고, 이곳에서 육로로 조령을 넘고 충주를 거쳐 한강에 도달하여 서울의 용산에 이르는 순서였다. 그 중 대구는 부산포에서 동래, 양산, 밀양, 청도를 거처 상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일본인에게 사무역(私貿易)을 허용했으나 장사를 가장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자, 성종 3년(1472) 나라에서 직접 필요한 상품을 사들이는 공무역(公貿易)만 허용하게 되었다. 이에 낙동강 수로의 요지인 달성군 화원면 천내동에 일본 상품을 수입해 보관하고 무역업무를 맡은 왜물고(倭物庫)가 설치되었다. 이 왜물고는 화원에 있다 해서 화원창(花園倉)이라고 했는데, 화원창은 원해 국초부터 군자(軍資)와 미곡(米穀)을 저장하던 곳이었다. 왜물고에 수장된 상품은 농한기에 서울로 운반하여 관청에 보내고, 나머지는 국내 상인들에게 팔았는데, 그 수송로는 대체로 경상도의 공물(公物)수송경로와 같았다.

 

 화원 왜물고는 이처럼 조선중기에 대일무역의 중요한 몫을 하였으나,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겨 성종 16년 삼포를 중심으로 사무역이 다시 부활되자, 성종 17년(1486) 이후 문을 닫게 되었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한제국기

 대구는 선조 34년(1601) 경상감영 설치 후 경상도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나, 1895년 전국지방제도의 개혁으로 전국이 8도에서 23부로 개편됨에 따라 대에는 23부의 하나로써 23개 군을 관할하는 대구부(대구관찰부)가 설치되었다. 또한 이 해에 대구진위대가 설치되어 종로(현 만경관 MMC 부근)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는 지방제도가 시행되어 대구는 다시 대구군으로 개칭되면서 경상북도의 중심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이듬해 9월에 그 산하인 대구이사청이 설치되고, 대구역이 개통되는 등 대한제국 말기에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대구지역에서는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로부터 자주성을 지키려는 교육, 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1906년에 대구광문회와 대구광학회가 결성되었고, 대구광문회에 의해 대구민의소가 설립되었다.

 

 특히 1907년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 등이 대구민의소를 기반으로 하여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이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천삼백만원의 차관을 담배 끊는 운동으로, 국민 스스로가 상환하고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되어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고종황제로부터 일반국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 속에 진행되었으나, 일제의 이간과 탄압으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국채보상운동 보도기사

 1907년 3월 8일 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금 모급 금액표

 1907년 5월 22일자로 경무고문 환산중준(丸山重俊)명의로 작성된 국채보상모집에 대한 보고서이다. 1907년 4월 말까지 각 도 국채보상회에서 모집한 금액을 표로 작성하였다. 융희 1년(1907)

 

 의연소공함 회답(義捐所公函 回答)

 지방 리, 동(里, 洞)지역에서 시, 군(市, 郡)의연소에 국채보상운동에 관련된 내용을 공문으로 회답한 문서로서 그 당시 국채보상운동의 하부 조직, 기구까지 알 수 있는 문서이다.

 

 국채보상운동 회문(國債報償運動 回文)

 이 회문은 1907년 2월 11일 창원향고에서 각 면에 보내는 문서로 말미에 창원향교의 도장과 회문 작성자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있다. 이 문서 내용 역시 국체보상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국체보상금 의연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 회문은 보상소에서 각지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향고에서 보낸 것으로 국체보상운동에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일제통감부의 대구이사청으로 쓰인 경상감영의 선화당 1909년 촬영

 대구역 승강장의 모습 1905년 개통

 경상농공은행 현 산업은행 대구지부 위치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17일자

 패물 폐지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활동 장소인 중구 남일동 진골목 일대

 서상돈(1851~1913)

 한말의 의병 모습

 대구민의소 발생 국체담보금 영수증

 김광제(1866~1920)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김광제 상소문(金光濟 上疏文)

 대한제국시기 경무관(警務官)을 지내던 김광제가 을사조약 체결 직후 올린 상소문. 본명인 김홍제(金弘濟)로 올렸으며,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권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광무 9년(1905)

 

 석람고(石藍稿)

 김광재(1866~1920)의 유고(遺稿) 석람(石藍)은 김광재의 호(號)이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역사

 광무 10년(1906)

 

 신호적

 갑오경장 이후 바뀐 호적양식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에 부제(府制 )를 실시, 이 때 대구는 대구부(大邱府)로 개칭되어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도 다양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1915년에는 윤상태(尹相泰), 서상일(徐相日)등 대구지역의 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앞산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재건 달성친목회)가 만들어졌고, 같은 해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었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대구에서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시작으로 수 차례 만세운동이 이루어져 경상북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영남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독립청원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을 공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결성되어 민족운동의 저변을 확산시키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해 의열단원 장진홍(張鎭弘)에 의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발생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딧불회 사건 및 태극단 사건이 발생하는 등 각 학교 학생들의 항일저항 운동이 계속되고 비밀결사가 활발히 이루어져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44년에는 일본군 제24부대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이 집단적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대구는 일제강점기의 탄압속에서도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한 지속적인 항일 투쟁이 전개된 고장이었다.

 

대표사진 삭제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독립선언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국내외에 배포한 독립선언서. 1919년

 

 파리장서사건 관련자료

 파리장서사건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직후 곽종석 등 독립대표가 파리강화회의 때 만국공관에 독립을 청원한 일을 가르킨다

 

 대구지도 1918년축적 1:10000

 일제의 임시토지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으로 1910-1915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측량하였다. 토지조사사업 종료 후에도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 일본육군참모본부직속기관)는 지형도 정비사업을 계속하였다. 지형도는 전국을 망라하는 1:5만 축적의 지형도와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 45개소를 대상으로 1:1만 축적의 지형도가 제작되어 총 925도엽이 간행되었다. 이 지도는 이때 제작된 45개소의 1:1만 지도 중 대구 지도이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중구 포정동 일대 1920년대

 대구부청(현 대구시청 위치) 1910년 건립

 1915년 12월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80연대(현 캠프헨리 위치)

 

대표사진 삭제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포고문

 3.1 독립만세운동 직후 곽종석 김복한 등 137명의 유림대표가 파리강화회의 때 만국공관에 독립을 청원한 문서

 

 태극단(太極團)독립운동약사(-史)

 태극단은 1943년 일제에 항거하여 대구공립상업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별명 T.K.D라 하였는데 태극단이라는 이름은 바로 태극기를 상징한다. 1973년

 

 입소명령서 / 출두명령서

 

 반딧불

 대구 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선독립을 위한 실력양성을 위해 연구회를 조직하고 발간한 비밀기관지. 1940년

 

 장진홍의사 옥중서신

 장진홍의사가 대구감옥에 수감중 가족에게 보낸 편지. 1930년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1919년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 3.1운동 시가행진도

 정진홍의사 의거직후 조선은행 대구지점

 장진홍의사 판결관련 보도 동아일보 1930년 2월 18일자

 1919년 경북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사건)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현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통해 민족의 염원인 해방을 맞았다. 그렇지만 전국적으로 좌, 우 대립이 심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미군정하의 대구는 식량난과 콜레라 등 극적으로 불안하였다. 1946년 10월 1일에는 식량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어 소요사태가 경북지역, 다시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에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대구부는 대구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 6.25 전쟁기에 대구는 수많은 피난민의 피난처가 되었고, 낙동강방어전선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독제가 계속되자, 대구지역의 학생들은 2월 28일 독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2.28민주학생의거는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와 더불어, 자유당 독제정권을 물러나게 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시기에는 대구의 섬유산업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1년 대구는 달성군의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고산면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또한 1995년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대구광역시가 되었다.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본선경기를 치르고 2003년에는 하계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면서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8·15해방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8.15

 제헌의회 개원식 1948.5.31

 신탁통치 찬성집회

 신탁통치 반대집회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신탁통치 반대운동 유인물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6·25전쟁

 낙동강 방어선 전투 상황도

 낙동강 교두보에서 기관총을 사격하는 국군

​ 낙동강을 건너는 탱크부대 1950년9월

 왜관철교를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대치하는 국군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6.25전생 보도기사

 

 심리전 전단

 6.25전쟁중 북한 인민군에세 투항을 권고하는 전단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2.28 민주학생의거

 2.28 민주학생의거 지위광경

 ​경찰에 연행되는 시위학생

 ​경찰에 끌려가는 시위학생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2.28 민주학생의거 관련기사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3인조, 9인조로 짝을 이룬 3.15 부정선거 투표행렬

​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 3.15 선거 개표부정을 항의하는 학생, 시민들

 대구의 대학교수단 시위 1960.4.26

 

선거홍보물

 

대구광역시 향토역사관

 

 어느세 폐관시간. 아무도 없는 추운 냉굴에 오늘도 나 혼자 덩그러니.

 동물원이 어서 다른곳으로 이전되고, 땅속에 잠들어 있는 많은 보물들이 빛을 보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램. 아울러 이제는 허울뿐인 향토역사관 또한 달성유적의 유물들이 꽉 차 있는 달성토성의 전시관으로 변모했으면 하는 바람도 안고 돌아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