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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조선일보]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6] 단군릉과 대동강문명론

by 국강상 2021. 3. 24.

'단군→김일성' 역사 연결 노린 北… 김일성 교시 후 단군묘 대대적 조성

北 "평양 부근서 단군 유해 발견, 대동강 문명은 세계 5대 문명"
평양을 민족사 중심지 만들고 세습 독재 공고화 위한 억지 주장

이선복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입력 2016.05.11 03:00

 

 

 

 

이선복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북한 학계에서 단군은 오랫동안 신화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1993년 9월 28일 북한 학자들이 평양 근처에서 단군릉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며칠 뒤인 10월 2일 북한 사회과학원은 '단군릉 발굴 보고'라는 첫 공식 보고문을 발표했으며, 10월 12~13일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단군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공식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듬해 10월에는 엄청난 규모로 재건된 단군릉 복원을 기념하는 제2차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단군릉 발굴과 복원은 김일성의 관심과 지시에 따라 일사천리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는 1993년 1월 8일 단군릉 발굴에 대한 첫 교시를 내린 이후 1994년 7월 사망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1~2주에 한 번씩 단군릉에 대해 교시했다고 한다.

이른바 단군릉이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북서쪽에 있는 대박산의 동남쪽 사면에 위치한 고구려 양식의 반지하식 돌칸흙무덤(석실분)이다. 그 내부에서 남녀 각 한 사람분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단군과 그 부인의 유해라는 것이었다. 단군의 뼈는 연대가 5011년 전으로 측정되었다고 했다.

이 무덤이 단군의 것이라는 결론은 주변 일대에 단군과 관계된 각종 지명과 사적이 많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 문헌과 구전(口傳)에도 이 무덤이 단군릉이라고 알려졌다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신빙할 수 없는 구전과 문헌 기록을 토대로 단군릉이라고 설정한 다음,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꿰어맞춘 억지주장일 뿐이다.

북한이 1994년 복원·재건한 단군릉 전경. 부지는 총 1.8㎢에 이르며 길이 84m, 너비 80m의 기단을 조성한 뒤 화강암 1994개를 쌓아서 높이 22m, 너비 50m의 9층 피라미드형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앞 돌계단 양쪽에는 단군의 아들과 신하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오랫동안 단군묘로 알려졌던 이 무덤의 광복 직후 모습이다.

단군이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에 이어 평양 일대에 단군이 지배하던 고대국가가 기원전 3000년대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금동 가공 기술, 순장(殉葬) 제도와 군사 제도를 갖춘 발달한 국가 단계 사회로서 고유 문자와 종교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대동강문화가 세계 5대 문명의 하나였음을 강조하는 '대동강문명론'은 단군이 실재 인물로 설정됨과 더불어 서서히 대두했으며 1998년 들어 뚜렷이 부각되었다.

대동강문명론은 1989년 나타난 '조선민족제일주의'에 입각한 역사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민족제일주의란 주체사관을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들고, 김일성을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로 떠받들며 우리 역사가 단군에서 김일성으로 연결된다는 인식 체계의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단군릉의 조사와 복원에 김일성이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선민족제일주의에 입각해 단군을 실존 인물로 만들고, 단군과 김일성을 동격으로 설정하기 위해서 당연히 모든 고고학적 시기의 편년과 해석이 놀라운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주장하는 바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만약 대동강 유역에서 100만년 전부터 독자적인 진화 계보를 이루며 인류가 진화했다면 한반도 주민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전혀 달리 생긴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즉 대동강문명론은 이전에도 북한에서 반복되어왔듯 정치적 필요에서 제시된 지침에 따라 이루어진 우리나라 선사(先史)와 고대사에 대한 해석이다. 1998년 북한 정권 창설 50주년을 맞아 세습 독재의 공고화를 위해 평양을 민족사의 중심지로 설정하고, 김일성 가계(家系)를 우리 역사의 핵심으로 추앙하려는 질 낮은 역사인식 체계에 불과하다.

주체사상이 등장한 1960년대 말 이래 북한에서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는 고도의 정치적 수단이 되어버렸다. 단군릉 발견이나 대동강문명론과 같은 주장은 북한 정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또 어떤 형태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주장에 흔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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