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조문국박물관
15.05.01
지난 2014년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에서 적지않은 전시량의 조문국 유물을 보고 이 여정을 계획했더랬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찾았네요(1년 밖에 안지났는데 왜 2년이라고 했지?)
의성조문국박물관
고구려식의 금동관을 중심으로 한 탑리고분에서 출토된 대표유물들의 복제품이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진품은 국립대구박물관, 고대실에 전시되어 있다.
국립박물관 외에 공립박물관으로 독도박물관, 대가야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그리고 이번 의성조문국박물관을 다녀왔는데 조문국박물관은 다른곳과는 특별하게 1층에 어린이 고고 발굴 체험관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의성은 국내에서 고령화 1위의 늙고도 늙은 지역이다.
상설전시관은 2층에 있다. 조문국 관련 자료가 얼마나 있을까 기대가 된다.
의성/조문국의 역사속으로
역사의 빛
의성/조문국의 역사속으로
2. 의성인의 유래
인류의 진화 과정과, 순장문화, 복식체험, 의성의 기록문화에 관해 전시를 해 놓았다.
3. 환경 변화에 따른 의성인의 생활사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의 모습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의성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과 성혈의 흔적을 살펴보다가 내가 자란 우리 동네 주변에도 고인돌이 있었다는 사실. 바로 그 동네 살고 있던 친구녀석에게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하하 왜 난 몰랐지? 암튼 다음에 시골 내려가면 꼭 한번 제 눈으로 확인을 해보려고 한다.
4. 조문국의 성립과 소멸
드디어 조문국에 관한 내용이 나오기 시작한다.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기에. 어떤 내용들이 있을까.
조문국
조문국(召文國)은 삼한시대(마한, 진한, 변한) 의성지역에 뿌리를 둔 진한 12국 중 하나의 나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2년(AD185)DP 신라(新盧國 신로국)가 조문국을 벌하였으며, 「지리지」에는 조문국이 신라 경덕왕때 문소군(聞韶郡)으로 되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의성부(義城府)가 되었다고 한다.
조문국의 형성 시기는 다른 삼한시대 국가(城邑國家 성읍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략 기원전 3세기 내지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소멸시점은 문헌 기록에는 기원후 2세기로 전하고 있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옥의 기년(紀年)문제를 고려한다면 대략 3세기 후반 내지는 4세기 전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금성면 대리리 고총고분 주변의 시굴조사 과정에서 삼한시대 토광묘(목관묘 또는 목곽묘)가 확인된 바 있으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편찬된 다수의 문헌과 지도에서 의성군 금성면지역이 조문국의 중심지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끝"
원삼국시기의 소국(小國)에서 끝이 나버린 조문국은 사료(史料)에 남아있는 자료가 얼마되지 않아서 그들이 남긴 흔적과 유물들의 연구가 앞으로의 숙제들일꺼 같다. 기대가 커서 아쉬움도 컸겠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다른 사실들을 알게 되어 그 아쉬움을 달래게 되었다.
은제고리자루큰칼
5. 의성인의 찬란한 문화유산
의성의 고분들과 묘제양식, 그곳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전시 해 놓았다.
5-1. 의성의 고분
의성에서 출토 된 고분의 종류로는 돌무지덧널무덤, 유사돌무지덧널무덤, 구덩이식 돌넛무덤, 굴식동방무덤이 있다.
여기에서 또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 했지. 앞에서 본 선사시대의 유적과 함께 원삼국시대의 고분군 또한 내가 살던 곳에 많다는 사실을. 내가 살았던 의성군 다인면의 면 소재지가 서릉리(西陵里)인데, 서릉이라는 명칭이 릉의 서쪽 이라는 뜻이거든. 띄엄 띄엄이지만 저렇게 많이 분포하고 있을 줄이야 내심 뿌듯하다. 고부심마져 느낀다(고부심=고분 자부심)
5-2. 독특한 추가장
추가장(追加葬)이라 하면 보통 돌방무덤(석실분 石室墳)으로 조성된 묘에 시간차를 두고 시신을 안치하는 것을 말한다.
의성 대리리 3호분은 처음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과 덧널무덤(목곽)을 주곽과 부곽으로 하는 2곽 구조로 축조하면서, 고분이 조영된 이후 분구 내에 추가로 유사돌무지덧널무덤(변형적석목곽묘)인 1곽이 추가장된 구조이다. 특히 의성 대리리 3호분에서 확인 된 추가장은 1차 묘의 봉분 일부만을 이용하여 추가로 묘를 쓰는 방법으로 1차묘와 2차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점에서 독특한 추가장 양식으로 주목된다.
대리리 2호분의 추가장
대리리 2호분은 무덤의 주인공이 2명으로 확인되었다. 먼저 A봉토의 무덤이 만들고, 이후 B봉토가 만들어졌다. 이때 B봉토의 무덤은 A봉토의 무덤이 파괴되지 않도록 조성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리리 3호분과 같은 추가장 된 구조이다.
5-3. 의성의 제의
분묘제의가 무엇일까?
분묘제의란 시신을 안치할 때 하는 제사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의성지역에서도 고분축조 당시의 제의를 알 수 있는 유물 및 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와 마구류 들이 주종을 이루는데, 분묘제의는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과 함께 생활의 한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매우 주목된다. 의성지역 고분에서는 학미리 고분과 대리리 고분에서 확인되고 있다.
의성 발굴 50년 역사
의성지역에서 고대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60년 탑리 고분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5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주요 유적 발굴 및 지표조사현황을 살펴보면 발굴조사가 13회, 지표조사가 3회 있었다 시기별로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발굴이 2회,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산포지 발굴이 1회이며 삼국시대의 고분은 발굴 10회, 시굴 1회가 있었다.
5-4. 의성의 토기
신라토기
경주에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 축조되기 시작하는 4세기 후반부터 영남지방 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낙동강 이동(以東)양식과 이서(以西)양식으로 분화되었는데, 넓은 의미의 신라 토기는 이들을 모두 포함한다. 하지만 낙동강을 경계로 이동양식을 신라전기양식, 이서양식을 가야(양식)토기로 구분할 수 있다.
신라전기양식 토기는 가야토기보다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강하지만 형태상 약간의 지역차도 있어 경주양식, 창녕양식, 의성양식 등으로 지역양식을 설정하기도 한다.
고배 (굽다리 접시)
- 대체로 그릇과 뚜껑의 깊이나 운두가 높고 무개식도 많다.
- 다리의 형태가 직선적인 사다리꼴이고 거기에 뚫린 구멍이 장방형이며 위와 아래의 것이 엇갈리게 배치되었다.
- 뚜껑의 꼭지는 단추 모양의 것도 있으나 굽다리 모양이 주류를 이룬다.
- 무늬는 대칼로 새긴 기하학적 무늬이다.
장경호 (긴 목 항아리)
- 목과 어때의 접착부다 각을 이룬다.
- 굽을 확대한 것 같은 다리가 달리는 것이 많다.
- 무늬는 각종 도구로 새긴 기하학적 무늬이고 토우를 붙이기도 한다.
가야토기
경주를 중심으로 양식적 통일성이 강한 신라토기와는 달리 가야토기는 전체를 하나의 양식으로 묶을 수 없을 만큼 지역색이 강하여 사실상 몇 개의 지역양식으로 존재하였다. 이를 함안양식, 진주-고성양식, 고령양식으로 구분하며, 이들의 분포지를 각각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의 정치적 세력 범위로 판단하고 있다.
고배 (굽다리접시)
- 뚜껑과 그릇 모두가 납작하다.
- 다리의 형태가 나팔상이고 거기에 뚫린 구멍이 세장방형이며 위와 아래의 것이 한 줄로 배치되었다.
- 뚜껑의 꼭지는 단추형에 한정된다
- 무늬는 점선문이 많다
장경호 (긴 목 항아리)
- 목과 어깨가 곡선으로 연결되어 몸체가 둥근모양이다.
- 다리가 없는 것이 많고 굽받침이나 높은 기대 위에 얹혀진다.
- 무늬는 목에 돌려진 물결무늬에 한정된다.
신라양식의 여러지역 굽다리접시
상주상리 / 의성대리리2호분 / 구미황상동 / 구미황상동
경주양식의 굽다리접시
의성양식의 굽다리접시
의성에서는 어떤 토기를 사용했을까?
의성 지배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탑리고분, 대리리 고분, 학미리 고분, 조탑리 고분 등에서 발굴된 토기를 살펴보면, 의성지역에서 제작된 토기는 4세기에서 6세기에 신라에서 제작되던 토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굽다리접시, 목항아리, 뚜껑 등에서 신라토기와 양식적 차이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굽다리접시란?
고배라고도 하며, 삼국시대와 신라 통일기에 주로 유행하였으나, 8세기 이후 소멸하였다. 초기에는 뚜껑이 없고, 굽다리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형태였으나, 4세기부터는 굽다리에 장방형의 구멍이 생기고 뚜껑을 갖춘 예도 많아졌다.
의성양식 고배 중 일단투장고배는 다른 지역에 비해 몸통이 깊고, 굽다리 아랫부분에 뚜렷한 돌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단투창고배의 뚜껑받이는 6세기 때까지 몸통밖으로 기울어진 형태가 지속된다.
항아리란?
목의 길이에 따라 단경호와 장경호로 나누며, 굽다리가 달린 것과 달리지 않은 것이 있어 구별된다. 굽다리 접시와 함께 신라시대 대표 토기이며 8세기 이후 고배와 함께 소멸되었다.
의성양식 장경호는 목이 몸통보다 상대적으로 길며, 항아리의 몸통에는 돌대가 여러 줄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귀달린 항아리란?
단경호에 2개, 3개, 4개의 귀처럼 생긴 장식이 달린 항아리를 말하며 이부호, 삼부호, 사부호 라고 부른다. 단경호의 변형이며, 의성지역에서는 대리리 2호분, 3호분과 학미리 3호분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다.
굽다리 항아리란?
장경호나 단경호에 통형기대 같은 다리가 달린 기종이다. 의성지역에서는 탑리 5곽, 대리리 2호분, 조탑리 고분군에서 다수 출토되며, 인근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후평리 고분군
후평리 고분군 내 옥산~풍천간 도로 확/포장공사부지에 대해 봉토분 2기를 발굴/조사하였다. 1호분은 매장주체부 외 1기가 더 조성되었는데, 구조는 순수목곽묘(1-2호)와 위석목곽묘(1-1호)로 구분할 수 있다. 2호분은 석곽묘를 매장주체부로 한 단독묘이다.
유물은 개, 고배 등의 토기류 42점과 철촉, 철부 등의 철기류 18점, 총 60점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의성양식토기에 해당한다. 축조시기는 대리리 3호분, 탑리 고분 제 4곽, 군위 고곡리 5-4호 출토품과 유사하고 있어 5세기 후엽으로 추정된다.
조탑리 고분군
조사결과 봉분이 남아 있거나 봉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대략 밑지름이 10~16m이었고, 봉분에 돌을 쌓은 돌무지무덤 다수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다양한 토기류와 도자/철부/철겸 등 농공구류가 대다수이고, 투겁창/철촉 등의 무기류와 재갈/등자 등 마구류, 허리띠장식 등은 몇몇 유구에서만 출토되었다. 토기는 재지계토기와 경주계토기로 나누어지는데, 처음에는 같이 부장되나 나중에는 경주계토기만 부장되었다.
재지계토기는 의성양식을 띠고 있는 토기가 많아 조탑동일대도 의성지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탑동 -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탑리고분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탑리 고분군 중 산정부(해발 150.5m)의 가장 큰 봉토분 1기를 발굴하였는데 하나의 봉토분 내에 5기의 덧널(槨)이 배치되었다.
5기의 덧널 중 Ⅰ, Ⅱ덧널은 무덤을 만들 때 처음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 나머지는 완성된 봉토에 추가로 조성한 것이다. 이 외에 봉토에서 껴묻거리(副葬品)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또 다른 덧널로 보아 모두 6기의 덧널이 조성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조사된 덧널은 지상에 목곽을 넣고 사방에 돌을 쌓아 덧널을 고정한 다음 봉토를 쌓은 ‘유사돌무지덧널(변형적목곽묘)’이거나 적석목곽묘(V곽)이다.
적석목곽과 유사한 지역 고유의 묘제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신라식 금은위세품이 출토되어 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대리리 2호분
5세기 중반~후반에 축조된 봉토분이며, 양장분(兩葬墳)으로 증축분이다. 봉토 내에서 총 14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매장주체부는 주부곽식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평면형태는 11자형이다. 시신이 묻히는 주곽은 적석목곽묘이고, 유물이 매납되는 부곽은 목곽묘이다. 유물은 다량의 토기류와 금동제 관모, 금동제 신발, 금동제 마구류 등의 금속류가 부장되었으며, 매장의례로 순장이 확인되었다.
또 다른 무덤 옹관묘
옹관묘(독무덤)는 토기를 관으로 쓰는 무덤양식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옹관은 주로 일상용의 독이나 항아리를 사용하였고 시루, 바리, 그릇받침 등이 쓰이기도 하였다. 보통 두 개의 토기를 서로 맞붙여 사용하였다.
삼국시대의 옹관묘는 큰 무덤 주변에 끼여든 모습이 많다.
의성지역에서는 대리 2호분에서 부수된 상태로 1기가 확인되었다. 큰 항아리는 몸통에 귀가 달린 대호이며, 뚜껑은 다리를 떼어낸 고배형의 그릇받침을 사용하였다.
옹관
대리리 2호분
옹관묘란 일반적으로 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독 두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양식이다. 대리리 2호분의 4호는 후대 무덤 주인과 관련된 순장묘이고, 2개의 항아리로 구성된 것이 아닌 대호(주옹, 시신 및 부장유물 매납)와 그릇받침(器臺) 일부 (막음용, 뚜껑역할)를 맞붙여 관(棺)으로 사용하였다.
대호 안에는 토기 여러 점과 철제 손칼 1점이 부장되었고 시신과 관련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호(大壺)
높이 : 114.6cm
구경 : 58.1cm
동최대경 : 86.0cm
크기가 1m가 넘는 큰 항아리이다. 큰 몸체에 둥근 바닥과 약간의 긴 목을 가지며, 몸체 상위에 단면 타원형의 ‘耳(귀)’ 2개를 대칭되게 부착하고 있다. 몸체 외면에는 격자문 타날판을, 내면에는 원문 내박자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옹관하면 역시 나주!!! 국립나주박물관도 어서어서 가 보아야 할텐데.
의성 토기의 여행
의성 양식 토기들은 경상북도뿐만 아니라 경상남도와 충청도 일부지역에서도 확인되어, 당시 의성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의성 양식 토기는 의성읍과 안동, 상주, 선산 등 낙동강 수계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그러나 소백산맥 이북의 청원지역과 동해안의 영덕지역에서도 출토되어 주변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솔찍히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은 좀... 활발한 교류에서 그쳐야지...
5-5. 의성의 찬란한 빛
금동관(金銅冠)
- 삼국시대
- 탑리고분 Ⅰ곽
- 높이 : 39.0cm
- 복원 전체길이 : 52cm
- 탑리고분 Ⅰ곽의 금동관은 대륜(臺輪)에 전면 1개, 측면에 2개의 입식을 부착한 것이다. 입식은 긴 편이며 가장자리에는 끌로 오린 다음 비틀어 꼬아 만든 이른바 “우모형(羽毛形)”장식이다. 입식 맨 위는 좌우 대칭상의 구멍 2개가 뚫려 있다. 이러한 예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집안 3560호묘, 전 집안출토 관식 2점, 태왕릉 출토품 등이 대표적이고 신라에서는 경주 황남대총 남분의 은제관, 대구 달서 37호분 2싱 출토품의 예가 있다.
금동신발(金銅履)
- 삼국시대
- 신라
- 탑리고분 Ⅱ곽
- 길이 33.8cm
- 탑리고분 Ⅱ곽에서 출토되었고, 치수는 33.8cm로 어른의 발보다 상당히 크다. 이는 실생활에서 착용한 것이 아니라, 무덤 주인공의 지위를 보여주는 위세품으로 무덤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발 앞쪽 상판은 ㅗ 무늬를 맞새김 하였으며, 뒷판과 바닥판을 못으로 결합하였다. 신발바닥에도 장식으로 둥근 달개를 매단 것이 특징이다.
의성의 금동관은 어디에서 왔을까?
의성 탑리 고분에서 다수의 금동제품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금동관은 매우 주목되는 유물이다.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띠 모양의 테두리 위에 가장자리를 가늘게 자른 후 그것을 꼬아서 새의 깃털 모양으로 만든 세움장식을 세 개 부착하였다.
이런 모양은 신라의 금동관과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신라의 금동관은 주로 산(山)자 모양의 세움장식을 3단에서 4단 세우고 뒤쪽으로 사슴 뿔 모양의 장식을 비스듬히 세우는 것이 보통으로, 의성 탑리의 금동관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황남대총의 남분에서 출토된 은관이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신라지역에서는 출토되는 예가 많지 않다. 의성 탑리 금동관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에서 출토된 금동관식과 더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의성 지역간의 교류를 추정 할 구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렇게 상설전시실은 끝이 난다. 3층에 기획전시실과 건너편의 건너편의 민속유물전시관은 일정상 생략.
그리고 지금의 조문국박물관이 있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일양 선생
박물관 작은 전시
문화재 새로운 여정의 시작...
일양 박찬 변호사
일양 박찬 변호사는 평생 모은 1,300여 점의 다양한 유물을 박물관 건립에 맞추어 아무런 조건 없이 조문국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기증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붉은간토기에서 부터 원삼국시대 와질토기, 삼국시대토기, 고려청자 백자 등 거의 전 시기에 걸친 다양한 유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에 마련된 유물들은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에 이르기까지 한국 도자기의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증품입니다. 이 유물들은 일양 선생의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안목, 열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려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자기들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들입니다.
일양 선생의 기증으로 인하여, 의성조문국박물관의 소장유물 수준이 한층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의성지역의 유물기증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비록 조문국에 관한 뚜렷한 무언가를 알아 갈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내가 몰랐었던 제 주변의 옛 흔적들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게 어디일까. 지역사(史)의 특색을 살려 오래 오래 유지되길 바란다. 조문국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