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강상 2020. 4. 27. 19:15

14.04.06

 사원에서 서원으로.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숙수사터에 세워졌다. 절터에 서원을 조성하였다는 사실은 사원에서 서워으로 옮겨가는 시대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선 중종 대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1945~1554)은 순흥출신의 교려시대 유학자인 안행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요청에 의해 명종 5년(1550)에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의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화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안향과 안축(1282~1328), 안보(1302~1357), 주세붕을 배향하며, 매년 3월과 9월에 향사를 지낸다.

​ - 이상 국립대구박물관 전시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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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에서 보았듯이 불교에서 유교로의 변환기인 시점. 사원에서 서원으로라는 저 말이 참 가슴에 와닿았는데, 참 우연히도 이곳에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 동국(東國) : 예전 '우리나라'를 달리 이르던 말. 우리나라가 중국의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

*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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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37(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서적, 토지, 노비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사액)받았다.

 

 소수서원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와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유불 문화의 융합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승유억불 사상의 영향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원 입구에서 학자수라 불리는 의젓한 적송군락을 따라가면 맑고 맑은 죽계수를 만난다. 시냇가에는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와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와 경자바위가 있다.

 

 경림정과 지도문을 지나 만나는 서원 경내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통은 전당후묘, 즉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배치가 일반적인데, 소수서원은 동쪽이 강학공간, 서쪽이 제향공간이다. 서쪽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을 따른 것이다.

  

 

 숙수사지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당 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다. 당간지주는 당일 매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이다.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이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라는 절이 있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세워진 서원임을 알려주고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입구인 지도문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오랜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죽계수를 바라 보는 경림정이 있다.


 


 서원은 두 구역으로 나뉜다.

 

 강학영역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 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제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 한다.

   

 제향영역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와 전사청, 영정각등의 건물이 있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강학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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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제​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제와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제​, 그리고 때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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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초창기의 이름 백운동(白雲洞) 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학당으로 이르게 된다.

 

 명종이 사액한 소수서원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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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학당은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는곳으로 명륜당이라 불리며 유생은 이곳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하고,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 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향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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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방제 서편에 위치한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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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공묘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묘로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높여 부른 것은 흔치않은 일다.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의 제를 지내며 문성공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

 영정각 ​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은 특이한 일로 안향 초상(국보 제111)과 주세붕 초상(보물 제717) 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입니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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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헌 안향 선생의 초상과 ​풍기군수 주세붕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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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영대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맑은 날 윗 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

이곳도 최근에 지은 사료관이다. 사료관에는 서원의 시작에서 부터 철폐까지의 내용들을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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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의 운영

 서원은 원장(院長), 유사(有司)로 대표되는 원임(院任)의 책임하에 운영되는데, 서원이 사립교육기관 이였기 때문에 원중(院中)의 유림이 모여서 자치적으로 원임을 선출하였으며, 원장, 유사의 임명에 특별한 자격규정은 없으나 한 고을을 대표할 수 있는 명망있는 인사로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원장은 원사(阮事)를 총괄하며 서원을 대표하는 책임자이고, 유사는 원중 대소사를 운영해 나가는 담당자였다. 이외에도 유생교육을 담당하는 강장(講長), 훈장(訓長) 및 직일(直日), 조사(曹司), 공사원(公事員) 등이 서원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 내 중대사 및 각종 결정사항은 유생들의 모임인 유회(儒會)에서 결정되었다.

 이와같이 서원의 운영은 원장, 유사가 책임지고 있었지만, 지방관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초기서원의 규모와 제도를 실질적으로 규정한 퇴계도 서원운영의 자치성을 강조하였지만 경제적 문제등을 지방관이 담당하여야 한다고 하여 서원과 관가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는 서원이 사립교육기관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의 문교정책을 대행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원운영을 위하여 원규(院規)가 제정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원임, 원생의 자격과 선출절차, 교육목표, 교육내용, 서원운영에 관한 사항들이 수록되어 있다.

 

 

 동국도학의 원류도와 서원의 사회적 기능

 서원은 사림의 강학(講學) 장수처(長壽處)로서 성립되었지만 16세기 히우 사림이 정치,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그들 활동의 중요한 근거지로 자리 잡았으며, 향약시행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여 지방민의 교화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서원은 명분과 의리의 성리학적 이념에 크게 좌우되었던 붕당정치(朋黨政治)하에서 향촌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 거점으로서 그 역할을 더욱 증대하게 됨으로써 유림들의 여론인 사론(士論), 공론(公論) 조성의 집약소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서원은 동성부락(同姓部落)의 발달과 함께 동족집단 내부의 상호결속과 사회적 지위 유지의 필요성에 따라 그 중심기구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켜 나갔다. 서원은 문중 내 현조(顯祖)의 제향을 통한 향중(鄕中)에서의 벌족(閥族)으로서의 사적 지위 유지, 문중자제의 교육과 교화를 통한 문중 내 윤리질서의 유지 등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원은 당쟁 및 문중시비에 휘말리고 또한 대민작폐(對民作弊)의 온상으로 변모되어 사회문제화되자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서원의 도서관 기능

 서원은 그 설립의 일차적인 목적이 교육과 학문연구에 있었으므로 교육문고로서 도서의 수집, 보존의 역할도 함으로써 사립교육기관의 도서관 구실을 하였다.

 서원이 도서관 역할을 하였음은 최초의 서원인 이곳 소수서원에서 입증되고 있다. 주세붕은 이 서원을 세우면서 캐낸 구리그릇 300여근을 팔아 경사자집(經史子集) 등의 성리학서를 구입하였다. 그 뒤 사액서원으로 발전하면서 국가로부터 때때로 많은 서적을 하사받았으며, 서원에서 자비로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고 또한 각 서원과 문중에서 간행된 서책을 보내옴으로써 소수서원은 1600년 경에 107 1678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지방의 도서관 역할 뿐만 아니라 서적을 직접 출판하기도 하여 지방출판문화의 중심지로서 문화창달과 지식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원에서는 출판을 전담하는 간소(刊所)가 있었으며, 간행된 책은 주로 교육용과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문집과 유고(遺稿) 등이었다. 간행된 서책은 다른 서원 및 각 문중과 홍문관, 규장각 등에 배부되었다.

 정조 20(1796)에 편찬된 서유구의 누판고에 의하면 이때까지 78개의 서원에서 167종의 책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윗대 윗대 윗대 할아버지신 권부權溥께서도 안문성(문성공 안향)의 제자셨다.

 서원의 전개

 조선시대 서원은 중종에서 명종까지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까지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초기까지 남설기(濫設期), 서원이 정리되기 시작하는 영조17년 이후의 쇠퇴기 등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선현을 봉사하고 유생들의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으며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서는 향촌 지자체를 지향하였다. 배향(配享)기준도 학문이 깊고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자로 공론에 합당한 분이어야 가능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도 사액과 함께 전답, 노비, 서책 등을 내려 장려하였다.

 이후 집권세력에 의해 자파세력 확대에 서원이 이용되면서 그 설립이나 사액과정에 정치권이 작용하고,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이에 희생된 충신과 의사의 봉사(奉祀)가 성행되면서 점차 남설이 사회문제화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은 현종말부터, 시작하여 숙종대에 오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이 시기가 남, 서인간의 정쟁(政爭)의 격화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여기에 서원을 통한 자기존립(自己存立)을 모색하였던 지방사림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서원은 교육적 기능이 약화되고, 사현위주로 전환되면서 가묘적(家廟的) 성격을 가지는 사우(祠宇)와 구별이 모호해졌으며 영조 초에는 서원, 서우를 합하면 약 700개소나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폭발적 남설은 정치, 사회적 폐단을 심화시켰으며 따라서 영조 이후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고 대원군 집정시인 1871년에는 마침내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을 기준하여 1 1원의 원칙에 ᄄᆞ라 27개의 사액서원(賜額書院) 20개의 사액사우(賜額祠宇)만 남기고 모두 훼철(毁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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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의 교육

 서원의 강학(講學)과 사현(司縣), 제향(祭享)의 두 가지 기능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나 설립당시에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일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서원은 당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관학(官學)인 성균관과 향교에 대신하여 양반들의 교육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특히 서원은 사설이었기 때문에 관학인 향교교육이 과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는 다르게,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出世主義)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인격고시(人格考試)를 시켰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교육내용은 사서오경(四書五經)등 성리학이 중심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내면적 학문연마에 주력하였다. 한편 과거를 위한 공부도 본업은 아니었지만 중요시 하였다. 그러나 유학의 원리에 어긋나는 이른바 이단(異端)에 관계되는 서책은 철처히 금지하였다.

 교육방법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義理)를 문답하는 강()이라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을 택하였으며 평가는 4내지 5단계로 하였다.

  유생들의 입원자격은 소수서원의 경우 생원, 진사를 우선으로 하였으나 향학열이 있는자를 허락하였다. 이들 정해진 인원수는 없었고, 다만 서원 경제력과 관련하여 상주 유생수는 규제하였다. 그러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로서 사묘(祠廟)에 다시 모신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경우 30명까지 허락하였으므로 소수서원도 10명내지 30명 범위내에서 유생을 뽑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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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의 제향의식

 서원의 양대기능 가운데 하나가 제향(祭享)기능이다. 특히, 후기에 오면 교육기능이 약화되면서 제향기능은 더욱 증대되었다.향례(享禮)에는 매달 삭망(朔望)에 알묘(謁廟)하는 향알(香謁)과 정월초에 행하는 정알(正謁) 또는 세알(歲謁)  3,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행하는 춘추향사가 있다.

 

 

 춘추향사는 원장, 유사가 3일전에 입재(入齋)하면서 시작되는데, 행사주관은 선출된 헌관(獻官), 집사(執事)가 담당하였으며, 그 정차는 문묘향사에 버금가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다. 특히 이 때 서원 정문 출입은 복인(服人)이나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향사에는 지방관(地方官)을 포함하여 원근(遠近)에서 선비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이러한 향사의식은 유교적 질서를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유교보급과 정착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와는 달리 중국의 성인을 배제하고 우리나라에서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분을 서원의 주향(主享)인물로 기린 것은 신재(愼齎) 주세붕(周世鵬)이 회헌(晦軒) 안향(安珦)을 높인 이래 일종의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끝.